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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영화 관람 후기 (The Book of Fish REVIEW)영화 및 영상물/영화후기 2021. 4. 5. 02:12반응형
안녕하세요, 실버입니다.
지난 토요일, 구월동에 있는 인천CGV에서 영화 자산어보를 관람했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선보이는 새로운 사극 영화로 많은 분들이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인해 천주교를 믿고 있던 정약전은 형제들과 흩어져
먼 바다의 섬 흑산도로 유배됩니다.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속 생물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던 창대를 만납니다.
허나 창대는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에 호기심 많던 정약전은 자신이 배운 학문과 창대가 알고 있는
바다 생물의 지식을 서로 교환하는 거래를 하게 되고,
그렇게 ‘자산어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내용이 담긴 영화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은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작품으로서의 모습만 보고 후기를 작성합니다.
사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꽤 여러 작품을 봤지만,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정말 많이 못 봤습니다.
그나마 본 게 라디오스타 정도였습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상당히 감탄했습니다.
영화에 푹 취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감상을 말로 표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소시민적인 인간 군상들의 풋풋한 인심,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감정(유머나 감동, 애틋함),
아름다운 자연 풍경, 브로맨스적인 요소, 세상에 대한 한탄, 계급 갈등, 꿈과 이상 등등
정말 다양한 요소가 2시간 남짓한 작품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관객마다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모두 다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고,
서민들의 풍경을 담은 드라마 같다는 생각도 들고,
혹은 신분의 차이에 좌절하는 현실에 안타까울 수 있고,
목숨을 걸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또 중간에 나오는 시조 경연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밥상으로 치면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정말 여러가지 반찬이 차려진 한정식 같은 느낌입니다.
굉장히 입체적이고 다양한 맛이 있으며, 또 가장 한국적인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인물들의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훅훅 치고 들어옵니다.
(개인적으로 가거댁이 이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이 부분에선 전형적인 사극 형식이 아닌 최근의 경향을
이렇게 은연중에 담아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화려하거나 역동적이거나 액션 장면은 없습니다.
정말 담담하고 정적이고, 색채가 빠진 흑백 영화였음에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동시에 흑산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바쁜 사회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긴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인 정약전은 조정에서 쫓겨나 유배를 당했고,
그 유배를 최대한 활용하여 흑산도의 풍경을 즐기고, 자산어보를 집필하지만 말이죠.
바쁜 현대인들에겐 어떤 의미로 치유, 힐링의 장르로서
이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산어보는 그만큼 제게 흡입력 있는 영화였습니다.
내내 내적으로 감탄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자산어보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흑백’의 가치입니다.
예고편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흑백영화입니다.
그동안의 흑백 영화라고 한다면 보통은 컬러 영화가
팬서비스 차원에서 흑백판으로 상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매드맥스나 기생충이 대표적인 경우죠)
물론 이 흑백판들은 컬러 버전에서 잘 못느꼈던 인물들의 표정, 감정선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습니다.
다만 최근의 한국영화에서의 흑백의 활용은 좀 다릅니다.
제가 가장 기억나는 최근의 작품으로는 ‘항거:유관순 이야기’ 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실제 풍경에서 ‘색’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는 것으로
일종의 제한, 억압, 차별의 요소로 영화는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작품 속의 세상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작용합니다.
하지만 자산어보에서의 흑백은 좀 더 심오한 작용을 합니다.
작품 속의 조선은 후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정조 이후 순조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세도 정치, 즉 국왕의 위임을 받아 특정인, 또는 특정 집안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동시에 매관매직, 즉 돈으로 신분을 사고파는 일이 비일비재 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이 계속 들어오며 조선의 정통성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하며 원활한 세상을 구축하는,
성리학이란 하나의 진리로서 세워진 조선이
점점 지배층, 피지배층의 심화를 시작으로 이분법적인 현실로 변하게 됩니다.
작품 속에선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리학과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서학의 충돌,
그로 인해 주류와 박해를 받고 유배를 가는 정약전과 그 형제들에선 주류와 비주류가,
유배를 받는 신세지만 그럼에도 양반이었던 정약전과 양반들에게서 ‘상놈’이라고 불리는 창대,
이 두 사람 간의 사이에선 신분의 높낮음이,
유교 학문의 공부와 물고기 잡이로 상징되는 이상과 현실,
그리고 양반들이 입는 아주 새하얀 옷과 온갖 때를 다 묻어가며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서민층의 누더기 옷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 할 수 있습니다.
이 옷의 색은 흰 종이와 먹으로도 이어지기도 합니다.
자산어보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고고한 양반인 정약전은 현실의 호기심에 휘말려
점점 때를 묻히며 자신의 깨끗한 경험을 붓으로 한 획 한 획 묻혀 나갑니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분법’적인 분류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 자산어보에서의 흑백은 이런 다양한 형태의 이분법을 한 번에 관통합니다.
마치 떡꼬치처럼 모든 것을 꿰뚫습니다.
그래서 예고편을 보면서
‘흑산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흑백으로 담는다니 왜지?’생각했는데
영화를 관람한 후엔 ‘이 영화가 컬러로 개봉했다면 정말 밋밋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한된 색상인 흑백, 밝고 어두움으로 흑산도의 사람 사는 세상을 담았는데,
역설적으로 그게 더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어두컴컴한 문어탕에선 식욕이, 중간 중간마다 나오는 바다와 파도 장면은
하나하나가 아름다웠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책이 완성되는 과정이, 영화가 끝을 향할수록
하나의 수묵담채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꽤나 여운이 오래 남았고, 흑백의 강한 시각적 대비로 나온
흑산도의 풍경들이 꽤나 강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주관적인 평가는 ‘범작’입니다.
개인적으로 올 해의 영화 후보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올 상반기에선 꼭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영화가 정적이고 흑백영화라는 점에서 흥행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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